서당 학이재
학이재는 약 150년 된 지역사회의 문화교육기관으로서 '논어 제1편 학이'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배우고 때 맞추어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Would it not be a pleasure if you can learn and practice at the right moment?”
학이재
혜산(惠山) 이상규(李祥奎) 선생의 서재였던 학이재는 혜산이 돌아가시고 나서 집안의 서당으로 쓰이다가 전쟁 중에는 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 후손들이 기거를 하였고, 주변 집 없는 사람들의 살림 집으로도 사용되다가 오랜 기간 비어 있었습니다.
이 후, 2012년 후손(이현숙과 그 가족)이 들어와 현재까지 학이재를 관리하며 그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학이재에서는 라벤더를 중심으로 허브 농사를 하며 그 수익금으로 시골 문화 활성을 위해 매년 5월, 6월에 강연, 공연, 예술 전시, 체험학습 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학이재 고유의 정신을 가진 학습과 문화 예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또한 바쁜 현대인들의 삶이 학이재 축제로 위로 받고 힐링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학이재에서 나온 많은 문헌들은 경상대 도서관에 기증되어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보타니칼 & 허벌리즘
Botanical (보타니칼) 이란 약효 또는 치유력이 있는 식물 혹은 식물의 일부를 뜻합니다. 허브는 보타니칼의 한 부분이며 보타니칼 산물은 허브 산물이라고도 불립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460 BC – 370 BC)로부터 사람들의 질병을 판단, 치유, 완화하여 건강을 증진시키고 유지하는데 의학적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는 그가 발견한 질병에 대한 이론을 환자에게 적용하기 위해 자신만의 허브정원을 (Hippocrates Garden) 가꾸어 의약품 원료를 직접 재배하였습니다.
Herbalism (Herbal medicine)은 식물을 이용한 천연약물학을 뜻합니다. 허브는 오랜 인류역사의 의학적 치료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의학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식물로부터 파생된 화합물을 제약 의약품의 기초로 사용합니다.
Herbalist란 이런 허브의 효능을 치유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약초를 채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학이재에서는 라벤더를 중심으로 카모마일, 로즈마리, 타임, 바질, 세이지, 마조람, 사프란, 유칼리툽스베이 (월계수), St. John Wort, 야로우 사이프러스 등을 직접 재배하여 화장품과 차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Lavendula angustifolia, Lavendula stoechas, Lavendula intermedia; Matricaria chamomilla, Chamaemelum nobile; Salvia rosmarinus; Thymus vulgaris; Ocimum basilicum; Salvia spp.; Origanum majorana; Crocus sativus; Eucalyptus spp.; Laurus nobilis; Hypericum perforatum; Achillea millefolium; Cupressus sempervirens)
이메일: hakyje1880@gmail.com
축제 기간 외 학이재는 항시 개방하는 곳이 아닌 사유지입니다.
만약 축제 기간이 아닐 때 방문을 원하시면 미리 연락해주세요.
학이재 문화 증진을 위한 기부: 신한 110-276-055105 이현숙(헬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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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상류에 해당하는 묵곡 마을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한 가운데 주변의 땅들이 넓고 비옥하여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한 마을입니다. 묵곡 마을 위쪽에는 강 위에 절벽이 둘러 있는데, 그 산 이름이 엄혜산(嚴惠山)입니다. 엄혜산 아래 경치 좋은 곳에 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학이재(學而齋)입니다. 재실 이름이 논어 첫머리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나왔으니, 인근 선비들의 학문 도장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학이재는 묵곡 함안(咸安) 이씨(李氏)들의 재실로, 이곳에서 강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혜산 이상규입니다. ‘혜산’이란 호도 이곳 지명인 ‘엄혜산’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혜산은 1846년 고성 무양리(武陽里)에서 각포(覺圃) 제권(濟權)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종조부 지고공(芝皐公)을 따라 향교에 가서 석전례(釋奠禮)를 보고 돌아와 친구들과 놀 때도 예의를 익히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혜산은 숙부(叔父) 국포공(菊圃公)에게 집안의 친척들과 같이 소학을 배웠습니다. 혜산은 어려서부터 출사(出仕)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경륜을 펼쳐보고자 원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과거에 대비를 했고 그때 마침 고종 즉위년인 1864년 나라에서 어진 선비를 구하려고 과거를 실시했습니다. 혜산은 이 과거에 응시를 하였으나, 급제를 하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소정(韶亭) 조성교(趙性敎) 등에게 군자가 벼슬에 나갈 때와 나가지 말아야 할 때 즉 ‘출처대절(出處大節)’의 도리를 배우고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됩니다. 1872년 부모의 명으로 동생 영규(瑩奎)와 함께 당시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학문을 이끌고 있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 나가 중용과 대학과 성정(誠正) 수제(修齊) 등에 대해 의문나는 것을 물었습니다. 이때 성재는 친절하게 깨우쳐 주며 장래 큰 선비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이어 만성 박치복, 단계 김인섭, 해려 권상적 등 지역의 드러난 선비들을 두루 찾아가 천인(天人) 성명(性命) 등 성리학에 대해 질정을 했습니다. 1876년과 77년 연이어 부친과 모친의 회갑을 맞이해 흉년이 들자 잔치 대신 곡식을 풀어 빈궁한 사람을 구휼했습니다. 1880년에 고성에서 단성 묵곡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이때 나이 36세였습니다. 당시 고향의 친척들이 함께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고 계속해서 이주한 사람들이 늘어 한 마을을 이루어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혜산은 지리산 자락 묵곡으로 이주를 하고부터 번잡한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리산 아래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중 당시 이조판서 이세재(李世宰)가 조정에서 혜산을 천거하며 말하기를 “은거하며 몸을 깨끗하고 학문이 대단한 선비”라고 했습니다. 이 천거로 1885년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혜산은 그 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벼슬에 대한 생각을 접고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중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스승인 성재가 이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 “선비가 몸을 일으켜 행동하는 것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벼슬에 나가는 것과 나아가지 않는 것이 있다며 지금 벼슬을 제수 받았으면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해 임금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면서 출사를 권했습니다. 이듬해 스승 성재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 3년을 입어 제자의 예를 다하였고 성재 사후 단성의 이택당에 스승의 영정을 모시는 일에 앞장섰으며 뿐만 아니라 진주 도통사 창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는 공자의 학문이 널리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분통해 하면서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하였고 탁청대(濯淸臺)와 환구정(喚鷗亭)을 지어 은거하며 자연을 벗삼아 절개를 지키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경술년 나라가 망하자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마음은 망할 수가 없다”라는 글을 지어 더욱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을 벗삼아 학문에 정진하던 중 1921년 병세가 깊어지자 자제들을 불러놓고 ‘숭정학(崇正學)‘ 석자를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였습니다.
출처 : 경남일보 - (http://www.gnnews.co.kr/news/oldArticleView.html?idxno=214411)